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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미 초대전 《블루스 Blues》
2025.5.29~8.1 (재)한원미술관

(재)한원미술관 선임학예사 전승용

(재)한원미술관은 2025년 첫 전시로 정유미 초대전 《블루스 Blues》를 5월 29일(목)부터 8월 1일(금)까지 개최한다. 본 전시는 작가의 뛰어난 기량과 열정이 깃든 작품 세계를 조명하고, 예술적 사유와 창작에 대한 깊은 공감과 교감을 나누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더 나아가, 전시 지원을 통해 작가의 재도약을 돕고 새로운 활로를 함께 모색함으로써 성장을 위한 든든한 디딤돌이 되고자 한다.

(재)한원미술관은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동양화 장르의 유연성에 주목하며, 지필묵紙筆墨이라는 전통미술 양식을 고정된 과거의 유산으로 보지 않고, 주제와 매체의 다변화 양상을 고찰해 왔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작가가 지닌 가장 큰 부담감은 새로운 시도를 통해 발전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유미는 동양화의 전통적 요소를 서양화 재료로 표현하며 ‘전통’과 ‘현대’라는 두 개의 키워드 사이를 왕래해 왔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여전히 동양화가라는 뿌리를 유지함으로써, 재료로 장르를 구분 짓는 제도적 ‘잔재’와 새로운 ‘가능성’의 공존을 동시에 표출하는 것이다. 결국, 동시대 미술의 흐름 속에서 과감한 실험을 통해 동양화의 정수를 지키려는 노력의 하나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이 이번 전시는 동양화의 현재성을 짚어보며, 그 안에서 정체성을 천착하는 다양한 경향과 시각들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조망하고자 한다.

#바람편지: 푸른세상이 너에게
현대 사회는 빠르게 소비되고 손쉽게 대체되는 속도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쉼 없는 흐름 속에서 우리는 때로는 익숙한 시선에서 벗어나 삶의 다른 방향을 조망하고, 가끔은 잠시 멈춰 서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를 느낀다. ‘휘오이~ 휘오이~’ 바다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실려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내 안에 잠시 숨 쉴 틈을 주는 것. 우리는 그 시간을 숨비소리처럼 갈망하는 것은 아닐까. 일상에서 꾹꾹 참고 눌러 담았던 숨, 드넓은 바다 위로 솟아올라 휘파람처럼 울려 퍼지는 해녀들의 오묘한 숨비소리.(1) 그 순간만큼은 거대한 자연 속에서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고, 마음의 소리를 발산해 보는 것이다.

회화에서 재현은 단순한 현실 복제를 넘어 창작자의 고유한 목적에 따라 정신적 가치를 부여받는다. 정유미는 이러한 회화의 본질을 바탕으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표현 방식을 통해 어떤 장소에서 영감을 받아 미묘한 감정의 층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이는 풍경과의 직접적인 교감과 깊은 사유에 기울여 자신만의 작업 세계를 구축하고 인식의 지평을 심화시키는 것이다. 그의 미적 시도는 동양화의 규정된 틀을 서양화 재료로 풀어내는 데서 두드러진다. 특히 동양화 채색 기법을 응용하여 캔버스 위에 과슈와 아크릴 물감을 얇게 겹겹이 쌓아 올려 맑고 투명한 색채를 구현하고, 갈필渴筆 기법을 응용한 반복적인 붓질로 가는 선을 캔버스에 채워나가는 풍부한 표현 방식의 조화가 돋보인다. 그렇게 작가가 그려낸 장소는 구체적인 지역성을 띠지만, 작가의 기억과 정서가 담겨 사실적 공간의 차원을 넘어선 실존적 사유 공간으로 확장된다. 작품 속 풍경은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를 되묻고,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도록 이끈다. 작품 속에 투영된 정유미의 관조적 시선은 자아의 공백, 내적 불안 등 현대인이 겪는 보편적인 감정을 사회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되짚어보게 하며, 동시대의 정서를 성찰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번 전시 제목 《블루스 Blues》는 작품의 주요 색상인 블루Blue와 복수형 어미 ‘s’를 결합하여 블루가 가진 다채로운 색조를 표현하고, 블루스 음악 특유의 느린 템포에서 느껴지는 ‘선율감’을 통해 언어로 감각될 수 없는 자연의 비가시적인 풍경 소리와 파동을 시각화하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2) 일반적으로 파란색은 안정, 신뢰, 성공을 상징하며, 넓게는 평화, 희망, 자유를 의미하지만, 《블루스 Blues》라는 제목은 ‘슬픔’보다는 ‘청량함’, ‘무한함’을 강조하여 더욱 폭넓은 심리적인 의도를 내포한다.(3) 프랑스 전위 예술가 이브 클라인(Yves Klein, 1928~1962)는 무無 또는 무한대의 영역인 우주宇宙나 창공蒼空을 지향하며, 자신만의 블루(Intentional Klein’s Blue)를 통해 예술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파란 허공은 곧바로 깊이의 차원이나 다름없다. 처음에는 허무 그리고 그다음에는 심오한 허무가 되며 끝으로 파란 심오함이 된다.”라는 클라인의 언급에서 색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4) 그에게 있어서 파란색은 우주와 같이 무한하고 영적인 색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세계를 담아 예술로 승화시키는데 가장 적합하고 확고한 색이었다. 이처럼 정유미 역시 블루를 통해 가시적인 세계를 넘어선 무한한 사유의 공간을 탐색한다는 점에서, 이브 클라인이 추구한 예술적 맥락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스위스 심리학자 막스 뤼셔(Max Luscher, 1923∼2017)는 색과 신체 및 정서 상태의 연관성에 주목하여, 파란색은 고요함과 안도감, 초록색은 자부심과 끈기, 빨간색은 욕망과 지배력, 노란색은 창조력과 유쾌함을 나타낸다고 보았다.(5) 뤼셔에 따르면, 이 네 가지 감정이 균형을 이룰 때 인간은 내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심리 조절 시스템 또한 원활하게 작동한다.(6) 청靑색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음에도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데, 이는 하늘이나 물의 색 외에는 구체적인 대상이 연상되지 않는 추상적인 색이기 때문일 것이다.(7) 이처럼 색은 언어처럼 소통의 기능과 목적을 지닌 기호로서 감성적, 문화적 해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정유미에게 블루는 시각적 차원을 넘어 형언할 수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실체를 담아내려는 미학적 탐구의 근원이다. 정유미는 파란색을 단순한 채색 물감으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층적인 감정을 응축하는 매개체로 활용한다. 그의 작품은 형상의 제약에서 벗어나 색채의 깊이를 통해 무의식의 심연을 비추고, 살랑이며 넘실대는 파동은 시각, 촉각은 물론, 때로는 잔잔한 물결 소리처럼 몽환적인 청각적 환영을 불러일으키며 미지의 감각을 경험하게 한다.

《블루스 Blues》는 작가의 촉각적 경험과 무의식 속 추상성을 기반으로, 시청각이 교차하는 〈상상 풍경Imaginary Landscape〉 시리즈를 회화, 드로잉, 설치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선보인다.(8) 바다, 섬, 바람, 물, 바위, 산, 구름과 같은 생동하는 자연 속에서, 작가는 걷고, 듣고, 보고, 느끼며 풍경과 깊이 교감한다. 대자연과의 만남은 그의 내면에 스며들어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과 아련한 잔상들을 소환한다. 자연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오감으로 느껴지는 생생한 감각을 포착한 작가는, 대상의 은유적인 자태와 부드러운 솜털 입자를 지닌 자신만의 상상풍경으로 재창조하는 것이다.

정유미는 초기 작업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웃음’과 ‘친절’의 이면을 탐구하며, 사회문화적 배경 속 개인과 집단 간의 갈등을 조명해 왔다. 현대 사회에서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단절된 소통, 가령 어색한 인사나 표정을 작품에 담아내며, 이러한 현상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에 주목했다. 작가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현상을 면밀히 관찰하고, 무의식에 숨겨진 문제점을 피력하기 위해 감정노동자의 얼굴과 표정을 묘사하기도 했다. 런던 유학 이후 아이슬란드(2015), 노르웨이(2016), 여수(2021), 강릉(2022)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활동하면서 바다, 피오르, 호수 등 ‘물결’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들이 작품에 등장하기 시작했다.(9)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작가는 물리적인 장소에서 얻은 미시적인 체험으로부터 느꼈던 감정의 실체를 찾고자, ‘풍경’과 ‘감각’ 사이의 심리적인 거리를 가늠하며 고요하지만 요동치는 움직임을 표현하게 되었다. 이 시기 이후 작품들에서는 다양한 푸른색을 중심으로 강렬한 대비를 이루면서도, 초록색이나 보라색 등을 조금씩 곁들여 푸른색의 차가운 느낌을 중화시켜 조화로운 색채를 완성한다. 또한, 무형의 파동을 표현하기 위해 넓은 붓질로 입체적인 음영을 만들고, 선적인 요소에 집중하여 실제로 일렁이는 듯한 느낌을 연출한다.

〈구름파도와 마주 앉아 보렴〉(2025)은 푸른 하늘, 뭉게구름, 숲, 바다가 어우러진 제주도의 풍경과 그곳에서 들려오는 감미로운 소리를 모티브로 한다. 작품은 거대한 흰 덩어리가 장면 전체를 압도하고, 겹겹이 보이는 숲을 연상시키는 다수의 원기둥,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의 형태 등 자연의 외형적 요소들을 재구성하여 익숙한 이미지를 해체하고, 전에 없던 낯선 풍경을 선보인다. 특히, 바윗덩어리를 연상시키는 거친 표현은 작품의 독특한 질감을 더욱 부각한다. 주목할 점은, 기존의 캔버스-아크릴 채색 방식에서 벗어나 동양화 재료를 활용한 시도를 통해 작가만의 새로운 표현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는 점이다. 캔버스와 아크릴의 매끈한 표면은 색 자체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고 붓 터치를 통해 재료의 물성을 도드라지게 가시화하는 반면, 동양화 재료를 사용한 작품에서는 물과 섞인 색의 입자들이 종이 위를 유영하다 마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우연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물을 머금을수록 가벼워지고, 물성이 덜어질수록 빛처럼 밝아지는 효과는 매우 인상적이다. 대화체로 이루어진 작품 제목들은 자연이 속삭이듯 메시지처럼 다가와, 작품 전체에 아련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감돌게 한다. 〈초록 빛을 품은 숨〉(2025), 〈온기가 용기 되어〉(2025), 〈포근히 다가오렴〉(2025), 〈시선이 닿으면 길이 되듯이〉(2025), 〈달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지〉(2025) 각 제목에서 느껴지는 운율은 한 편의 시를 읽는 듯 깊은 여운을 남긴다.

〈Blue Drawing〉(2025)은 푸른 상상력으로 빚어낸, 공간을 감싸는 드로잉이다. 반투명한 약 10만 미터의 푸른색 나일론 줄이 수직으로 쏟아져 내려와 곡면을 이룬다. S자 곡선은 작가의 회화와 드로잉에서 핵심적인 표현 요소로, 화면 밖으로 확장되어 전시 공간의 기둥을 감싸는 구조물을 형성한다. 이 구조물은 관람객의 동선을 유도하여 자연스럽게 작품 속으로 이끌고, 기둥에 설치된 드로잉과 회화를 감상하도록 안내한다. 구조물에 드리워진 푸른빛의 가느다란 선들은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미세한 흐름의 변화를 만들어내며, 이러한 율동은 청각적인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는 관람자가 단순한 인지적 경험을 넘어, 공간 안에서 직접 움직이고 느끼는 ‘몸으로 느끼는 경험’을 통해 공감각적 지각을 넓히도록 유도하려는 작가의 의도이다.

〈Between Breaths〉(2025)은 나무로 제작된 2개의 입체 작품으로, 그 앞뒷면에는 10점의 회화(3~10호)와 18점의 드로잉(21×29.7cm)이 공존한다. 작가는 자연을 마주한 순간 떠오르는 감흥을 시각화하기 위해, 완전한 형태의 기록에 얽매이지 않고 즉흥적인 감각에 따라 빠르게 드로잉을 반복한다. 나무 구조물 곳곳에 뚫린 틈새들은 주변 작품들과의 연결고리가 되어, 예상치 못한 시각적 리듬감을 만들어내고, 작품 전체에 유기적인 균형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번 전시는 무형의 가벼움과 깊은 감성을 선물하며, 잊고 지냈던 우리 내면을 되돌아보고 위안을 얻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작가의 세심한 시선이 담긴 작품들은 잊혀진 감정을 부드럽게 일깨우며, 마음속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동경과 치유, 짙은 울림을 전한다. 마치 BoA의 『아틀란티스 소녀』 노래 가사, "저 먼바다 끝엔 뭐가 있을까?/다른 무언가 세상과는 먼 얘기/구름 위로 올라가면 보일까/천사와 나팔 부는 아이들/숲속 어디엔가 귀를 대보면/오직 내게만/작게 들려오는 목소리/꿈을 꾸는 듯이 날아가 볼까/저기 높은 곳 아무도 없는 세계"와 같이, 《블루스 Blues》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 길어 올린 ‘푸른 소리’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조용히 흔들며 무뎌진 감각의 결을 환기할 것이다.

(1) 숨비소리는 해녀가 물질 작업 중 물 밖으로 나와 숨을 고를 때 내는 독특한 소리이다. 별도의 잠수 장비 없이 맨몸으로 오랜 시간 잠수해야 하는 해녀들에게 숨비소리는 생명과 직결된 소리나 다름없다. 폐 속에 쌓인 이산화탄소를 빠르게 배출하기 위해 숨을 내쉴 때마다 ‘휘오이~ 휘오이~’ 하는 휘파람과 유사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해녀들은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쉬고 평균 10~20m까지 잠수하여 해산물을 채취한다.
(2) 블루스(Blues)는 미국의 전통 음악 장르 중 하나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지역 음악 스타일과 결합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수에 찬 영혼의 상태를 표현하는, 네 박자의 느린 템포와 애상적인 분위기가 특징이다.
(3) 창작집단 서프라이즈 정보, 『색깔의 수수께끼』, 김민경, 한은미 편역, 2006, p.284.
(4) 마가레테 브룬스, 『색의 수수께끼』, 조정옥 역, 세종연구원, 1999, p.189.
(5) 막스 뤼셔(Max Luscher, 1923∼2017)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철학, 심리학, 정신의학을 전공했으며, 뤼셔 색채 테스트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자기조절 심리학을 연구하며, 이를 바탕으로 뤼셔 색채 테스트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는데, 이 내용은 그의 저서 『우리 안의 조화의 법칙』(김지혜 역, 까치, 2003)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6) 권영결·박자은, 「치료적 효과를 고려한 주거공간의 색채디자인 방법 연구」, 『한국색채학회 논문집』, 제19권 제2호, 한국색채학회, 2005, p13. 재인용. (Jacob Liberman, Light : Medicine of thr future, Vermont, bear & company, 1991, p.48.)
(7) 하용득, 『한국의 전통색과 색채심리』, 명지출판사, 1989, p.214.
(8) 상상풍경想像風景은 특정 장소에서 얻은 관찰과 경험을 바탕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감정을 시각 언어로 표현하려는 예술적 시도이다. 이는 단순히 보이는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사의寫意 정신을 담고자 한다. (작가노트 발췌)
(9) 피오르fiord는 빙하의 침식에 의해 만들어진 U자곡에 바닷물이 들어와 형성된 길고 좁은 만을 의미한다. 주로 노르웨이, 스코틀랜드, 그린란드 등 냉대 또는 한대 기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지형이다.